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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시벌 로런스 로웰(Percival Lawrence Lowell, 1855년 3월 13일 ~ 1916년 11월 12일)은 미국의 사업가, 작가,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이다.
그는 일본과 조선을 여행하여 여러 기행기를 저술하여 당시 미국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극동의 두 나라를 자국인들에게 소개했다. 조선에서의 활동으로 노월(魯越)이라는 한국이름도 있다. 귀국 후 애리조나 주 플래그스태프에 로웰 천문대를 지었고, 여기서 화성을 관측하여 표면에 인공 수로(水路)가 있다는 주장을 하였으며 그의 천문대에서 성장한 후진들은 로웰의 사후 명왕성을 발견하게 된다. 명왕성의 이름 플루토(Pluto)와 그 천문 기호는 퍼시벌 로웰의 두문자 PL에서 따 온 것이다. 퍼시벌 로웰은 보스턴의 로웰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하버드 대학교의 총장을 맡았던 애보트 로런스 로웰의 형이었으며, 에이미 로웰(이미지즘 시인, 비평가, 출판가)의 오빠이기도 했다. 로웰은 1872년 노블 앤 그리노 학교를 졸업했고, 1876년에는 하버드 대학교를 졸업했다.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로웰은 자유분방한 학창 시절을 즐겼으며 상류 사교계의 생활을 만끽했다. 이후 1880년대 극동에 대한 호기심에 일본으로 여행을 떠나게 된다. 로웰은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고 1883년 5월 일본에 유람차 방문하여 지내고 있었는데, 여기서 그는 조선의 미국 수호통상사절단을 만나게 된다. 주일미국공사의 요청으로 로웰은 이들을 미국으로 인도하는 임무를 맡게 된다. 로웰은 통역관 미야오카 츠네지로와 함께 1883년 8월 18일 샌프란시스코를 향해 출발한 뒤 같은 해 11월 14일 다시 일본으로 돌아오기까지 9명의 조미수호통상사절단의 곁을 보좌하면서 국서 번역, 보좌 업무 및 통역관 역할을 수행했다. 보빙사 일행은 로웰의 고향인 보스턴 일대를 방문하기도 했다. 이후 일본을 떠나 조선으로 귀국한 일행 중 홍영식이 로웰의 노고를 고종에게 보고했으며 고종은 그를 국빈으로 초대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왕실의 초대에 힘입어 로웰은 12월 20일 다시 조선을 방문하였다. ■ 조선 방문과 이후 로웰은 조선에서 약 3개월간 체류하였는데, 이 기간 동안 그는 한양에 머무르면서 조선의 정치, 경제, 문화, 사회 등을 백과사전 형식으로 자세히 기록했다. 2년 뒤 1885년, 그는 이 기록을 정리하여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Choso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이라는 제목의 책을 내놓았다. 이 책에서 로웰은 풍물을 기록하는 것 외에도 고종의 어진(御眞)을 포함한 당시의 조선 풍경을 찍은 사진 25매를 남겼다. 특히 수학자 김낙집과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조선 방문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에서는 홍영식 외 소장파 관료들이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로웰은 일본에서 이 소식을 듣고 갑신정변의 내역을 상세하게 기록하여 조선의 쿠데타(A Korean Coup d'Etat)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 글은 당시 평론지 '애틀랜틱 먼슬리(Atlantic Monthly)' 1886년 11월호에 게재되었다. 이후 그는 귀국하기 전까지 일본에 오랜 시간 동안 머물렀으며, 일본인들의 종교, 정신 세계 및 행동 양식에 대한 책을 쓰기도 했다. 로웰은 일본의 언어, 종교적 관습, 경제 및 자신의 기행담 및 개인적 성찰 등을 논리적으로 기술했다. 노토(Notto, 1891년)와 신비로운 일본(Occult Japan, 1894년), 극동의 혼(The Soul of the Far East, 1888년) 등이 그가 쓴 책들로, 이 중 극동의 혼이 가장 유명하다. 보빙사 일행을 찍은 사진. 왼쪽에서 두 번째 인물을 퍼시벌 로웰로 추측하고 있다. ■ 천문 연구 1894년 로웰은 카미유 플라마리옹이 쓴 '행성 화성'(La planète Mars)을 읽고 화성을 관측하기로 결심했으며, 천문학을 그의 생업으로 바꾸게 된다. 로웰은 당시 밀란 천문대 수석이었던 이탈리아 천문학자 지오반니 스키아파렐리가 스케치한 '화성의 수로'에 관심을 가졌다. 1894년 로웰은 애리조나 주 플래그스태프으로 이주하여 살게 된다. 플래그스탭은 고도가 2천 미터 이상이었으며 구름 낀 날이 적은 곳이기 때문에 하늘을 관찰하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로웰은 여기에 많은 돈을 들여 천문대를 지었다. 이주한 후 15년 동안 로웰은 화성을 집중적으로 관측했으며, 화성 표면의 무늬를 자세하게 관찰하여 스케치를 남겼다. 로웰은 자신의 관측 내용을 세 권의 책에 써서 출판했는데, 제목은 각각 화성(Mars, 1895년), 화성과 수로(Mars and Its Canals, 1906년), 생명체가 있는 곳 화성(Mars As the Abode of Life, 1908년)이었다. 그는 자신의 관측 결과를 토대로 당시 널리 퍼져 있던 화성의 지적 생명체 거주설을 더욱 확신했다. 로웰이 행성 연구에 가장 큰 업적을 남긴 시기는 그가 죽기 전 8년 동안이었다. 그는 당시 해왕성 바깥에 존재할 것으로 추측되었던 '행성 X'를 찾기로 결심하고 남은 생을 이 미지의 천체 발견에 집중하게 된다. 로웰은 1916년 11월 12일 임종했으며, 천문대 근처에 있는 마스 언덕에 묻혔다. 행성 X 프로젝트는 로웰이 죽고 나서도 계속되었으며 결국 클라이드 톰보가 1930년 명왕성을 발견하면서 결실을 맺게 되었다. 명왕성의 천문 기호는 퍼시벌 로웰을 추모하는 의미에서 그의 이름 두문자 P와 L을 합성한 ♇로 정해졌다. 당시 로웰은 천왕성과 해왕성의 예측 위치와 실제 위치 사이의 차이점을 이용하여 행성 X를 발견하려고 했다. 그러나 현재 정확한 측정 자료에 의하면, 해왕성의 위치 차이는 당시 천왕성 및 해왕성의 질량 정보를 부정확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명왕성의 질량은 매우 작기 때문에, 가스 행성의 궤도에 지구의 관측자가 식별할 수 있을 정도의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다. [출처]ko.wikipedia.org/wiki/퍼시벌_로웰 [사진출처]en.wikipedia.org/wiki/Percival_Lowell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김마리아(金瑪利亞, 1891년 6월 18일 ~ 1944년 3월 13일)는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광산으로, 본명은 김진상(金眞常)이며, 김근포(金槿圃)라고도 하였다. 독립운동가 김순애의 친정 5촌 조카였다. 일설에는 1892년생이라는 설도 있다.
■ 학창시절 - 황해도 장연에서 지주인 아버지 김윤방(金允邦)과 어머니 김몽은(金蒙恩)의 3녀로 태어났다. 김윤방은 일찍이 기독교에 입교하여 고향 마을에 초등학교를 세운 선각자였는데, 김마리아가 어릴 때 사망했다. 그는 아버지가 설립한 소래보통학교를 졸업했고, 어머니도 곧 사망하여 김윤오, 김필순 등 숙부들의 슬하에서 자라났다. 김마리아의 집안은 민족 의식이 투철한 명문가였다. 김마리아의 고모부인 서병호와 그의 아들인 서재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일한 독립 운동가였으며, 김규식의 부인이며 역시 독립 운동가인 김순애에게는 김마리아가 나이 어린 종고모가 된다.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을 졸업한 숙부 김필순은 나중에 임시정부를 세운 노백린, 류동렬, 이동휘, 김규식 등과 가까운 사이로, 김마리아는 숙부의 집에서 연동여학교(정신여자고등학교의 전신)를 다니면서 민족정신을 갖고 있는 집안 어른들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1910년 연동여학교를 졸업하고 광주의 수피아여학교(수피아여자고등학교의 전신)와 모교에서 교사로 근무했다. 1914년에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히로시마 시를 거쳐 도쿄 여자학원에서 수학했다. ■ 독립운동 1919년 도쿄 여자학원 졸업을 앞두고 도쿄 유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2·8 독립 선언이 일어나자 황애덕 등과 함께 적극 참가했다. 곧이어 3·1 운동이 일어났을 때도 미리 귀국하여 황해도 지역의 운동에 관여했다가 체포, 구금되었다. 이때 고문을 당해 몸을 상한 뒤 평생 건강 문제로 고생하게 된다. 1919년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사건으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으나 고문후유증으로 인한 병보석으로 풀려난 사이, 1920년 미국인 선교사의 도움으로 상하이로 탈출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황해도 대의원이 되었으며, 난징의 진링(金陵) 대학에서 수학하였다. 1923년에는 미국으로 유학하여 파크 대학교와 시카고 대학교에서 공부하여 석사학위를 받은 뒤 뉴욕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뉴욕에서 다시 만난 황애덕, 박인덕 등과 함께 재미 대한민국애국부인회(근화회)를 조직하고 회장을 맡았다. ■ 최후 1933년 귀국하였으나, 경성부에 체류할 수 없고, 교사활동도 신학 이외에는 가르칠 수 없도록 하는 등 일본 경찰의 제약이 뒤따랐다. 원산부의 마르다 윌슨 신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신학 교육에 힘쓰다가, 1943년 오래전 고문으로 얻은 병이 재발하여 원산의 사택에서 졸도한 뒤 1944년 평양의 병원에서 사망했다. 미혼으로 자손은 없었고, 시신은 유언대로 화장하여 대동강에 뿌려졌다. ■ 사후 2ㆍ8 독립 선언에 함께 참가했던 이광수가 쓴 〈누이야〉(1933년)라는 시는 김마리아의 귀국을 기념하여 그를 소재로 쓴 것이며, 안창호가 김마리아같은 여성이 열명만 있었다면 한국은 독립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나 고문을 하던 일본 검사가 탄복할 정도로 의지가 강했다는 일화 등이 남아 있다. 그는 1938년을 전후하여 천주교, 장로교, 감리교등 한국 기독교 주요 교파들의 신사참배 강요에 협력하여 기독교인들이 대거 변절하던 시기에도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등 불굴의 의지로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았으며, 1998년 7월 이 달의 독립 운동가로 선정되었다. 서울 보라매공원에 동상이 건립되어 있다. 2004년에는 독립기념관에 "독립이 성취될 때까지는 우리 자신의 다리로 서야 하고 우리 자신의 투지로 싸워야 한다"라는 문구를 적은 어록비가 세워졌다. [출처]ko.wikipedia.org/wiki/김마리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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